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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이주노동자 정책과 시사점

2007. 11. 6(국가인권위원회 이주인권포럼)

독일의 이주노동자 정책과 시사점

                                         강수돌(고려대 교수, ksd@korea.ac.kr)

1. 에피소드 하나

  나는 1989년에 10개월 된 아이를 안고 아내와 함께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초기 임시 체류 기간(3개월)이 만료되기 전에 정식 비자를 받으러 독일 관청에 갔다. 줄은 길었지만 일처리는 오전에만 했다. 도대체 이 나라 사람들은 일도 안 하고 뭐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다음날은 또 일을 안 한다고 했다. 한숨이 나왔다. 하루를 그냥 보내고 그 다음날은 새벽같이 일어나 번호표를 받으러 일찍 나서야 했다. 그래도 우리보다 더 일찍 온 다른 ‘외국인’들이 많았다. 나 자신도 ‘외국인’이면서 독일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을 ‘외국인’이라 하니 좀 웃긴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 순서가 되어 관리를 면담하는데, 마치 ‘기분 나쁘다는 듯’ 온갖 인상을 쓰면서 이런 저런 서류를 따지고 체류 이유와 배경을 꼬치꼬치 묻기도 했다. 나와 아내는 서투른 독일 말에, 대충 알아듣고 대충 대답한 것 같다. 기억에 또렷이 남는 것은 그 시간이 매우 괴로웠다는 것이다. 오래 기다리거나, 날을 벼르고 벼려 간 상담 시간이 괴롭다는 기억, 이것이 결코 독일의 첫인상을 좋게 하진 못했다.
  그 다음으로 상처받은 기억은 방(Wohnung)을 구할 때였다. 외국인, 학생, 게다가 어린 애기까지 있는 부부, 이 3대 요건을 두루 갖춘 나는 제대로 된 방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아침 일찍 ‘월셋방’ 안내 신문을 사들고 서투른 독일말로 “아직 빈 방이 있냐?”고 묻자, 집주인 왈, “강아지 키우는 부부에겐 방을 주겠지만, 애기 있는 부부에겐 곤란하다.”고 했다. 정말 우리는 ‘개만도 못한 인생인가?’라며 그 날은 매우 우울하게 보낸 적이 있다.
  물론 그 뒤로 독일 대학에서 공부하며 생활하는 과정에서 나는 제도적 평등과 불평등, 사회적 평등과 불평등의 모습을 다양하게 경험했다. 물론 좋은 경험이 더 많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내가 독일 사회나 사람들에 갖는 편견과 선입견도 내 마음 상태에 꽤 중요한 역할을 하곤 했다. 대개는 나와 상대방의 상호 관계에 따라, 즉 서로가 서로에게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진실하고 평등한 관계의 실현 정도가 달라졌다.
  그런데 정말 흥미로웠던 것은, 내가 박사 학위를 마치고 1994년 여름에 귀국할 때였다. 비자 담당 관청을 찾아 멀리, 또 서둘러 갈 필요도 없었다. 바로 집 옆의 동사무소 같은 데로 가도 된다고 했다. 가서 직원에게 “이제 공부가 끝나서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한다.”고 말하니 곧 환한 얼굴을 하며 약 1분만에 여권에 도장을 팍팍 찍어주며 “Alles klar! Tschuess!”(만사 오케이! 안녕!)라 했다. 아니, 이렇게도 쉽게 단 1분만에 모든 출국 절차가 끝나다니,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아하, 들어오는 것은 거리끼지만, 나가는 것은 대환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야, 박사 실업자가 우글거리는 독일에 나 하나만이 아니라 수많은 (외국인) 박사들까지 일자리를 찾겠다고 나서면 좀 골머리가 아프긴 할 것이다. 게다가 딸린 식구들도 있으니 말이다. 내가 만약 ‘관리자’의 눈으로 본다면 이런 모순된 정책도 극히 지당한 논리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 국제 이주 노동이 발생하는 까닭

  피터 궝 뉴욕시립대 교수에 따르면, 냉전이 끝난 뒤 세계에서 약 1억 8000만 명이 기회를 찾아 다른 나라로 이주했다(중앙일보 2007.7.24). 이주민의 입장에서는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욕구가 이주의 가장 큰 동인이다. 구조적으로 보자면, 한쪽에서는 노동력이 부족하고 다른 쪽에서는 노동력이 넘친 결과였다. 양쪽의 공통점은 노동력 활용을 통한 부의 축적과 경제 발전을 목표로 한다는 점이었다. 요컨대, 한편에서 ‘잘 살아보자’는 욕구, 다른 편에서 ‘노동력 활용’을 통한 경제 발전의 필요가 서로 맞물린 결과, 국제 이주가 발생한다.
 그런데 국제이주에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불평등 관계’가 구조적으로 내재한다. 자본의 자유와 노동의 부자유가 바로 그것이다. 특히 1980년대 이후 시장 개방과 자유무역을 고취하는 분위기에 따라 자본과 상품은 국경을 넘어 더욱 자유롭게 흘러간다. 자본의 속성상 자본은 인건비가 싸고 원료 조달이 쉬우며 판매 시장이 넓은 곳을 찾아 부단히 움직인다. 인건비를 기준으로 보면 자본은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진출한다. 그러나 보다 더 나은 임금을 추구하는 사람은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가고자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람은 자본에 비해 전혀 자유를 누리지 못한다. 선진국 시민들은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속에 이를 막아줄 수 있는 보증 장치로 국경이란 보호막의 강화를 원한다. 선진국 자본과 국가는 후진국 노동력이 무단으로 국경을 넘어 자국 내 노동시장을 위협하면 혼란과 무질서가 발생할 것이라 두려워한다. 결론은 국경 통제다. 국경 통제의 밑바탕에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자본은 초국적/초민족 자본이 된 지 오래지만, 노동은 국가와 민족의 틀 안에 갇혀야 하는 것이 전술한 ‘불평등 관계’의 본질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신자유주의 세계화는 하나의 시장, 하나의 공장, 하나의 이윤 공간을 추구하며 세계 곳곳을 가리지 않고 강력하게 침투하는데, 바로 그 과정에서 기존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 파괴되고 그로 말미암아 ‘뿌리 뽑힌’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 도시로 이주하고 대도시로 이주하고 마침내 국경을 넘어 (낯설고 무섭기도 하지만 호기심과 동경심도 자극하는) 외국으로도 이주하게 된다. 이제, 국제 이주의 원인은 보다 근본적으로 설명된다. 즉, 자기 땅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던 사람들이 더 이상 뿌리를 유지하며 살 수 없게 된 상황, 바로 이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삶의 기회를 찾아 하나의 돌파구로서 어쩔 수 없이 국제 이주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제 ‘국제 노동 이민’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더불어 갈수록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전략적 선택이 되고 있는 것이다. 즉, 피상적으로 단순히 자신의 노동력을 더 비싼 값에 팔아 더 짧은 시간에 더 많은 돈을 벌고자 하는 차원으로만 국제 이주 문제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은, 국제 이주 문제를 단순한 ‘노동력’의 시각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의 시각으로 봐야 한다는 말이다.


3. 독일 이주 노동자 정책의 흐름과 특성

  독일은 이미 19세기 말 통일 이후 국가 주도 산업화 시기에 특히 루르 지역 탄광촌을 중심으로 폴란드로부터의 이주민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주재순 2007). 다른 편에선, 수백만, 수천만의 유럽 사람들이 좀 더 나은 삶을 찾아 브레멘 등을 거쳐 미국 뉴욕으로 이주해가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은 1955년에 300명의 이탈리아 노동자를 양국 정부 간 협약을 통해 슈투트가르트로 초빙한 것을 시초로, 스페인, 그리스, 터키, 포르투갈, 튀니지, 모로코, 유고, 한국 등에서 이주노동자를 불러들인다.
  독일의 이주 노동자 정책의 역사를 노동력 모집 단계(1955~1973), 모집 정지 및 부분 통합 단계(1973~1980), 귀국 장려 및 사회통합 단계(1981~1998), 이주 인정 단계(1998~현재)로 나눌 수 있다. 특히 1998년 이후 ‘이주 인정’ 단계에서는 기존의 ‘독일은 이주국이 아니다.(Deutschland ist kein Einwanderungsland.)’라는 구호가 더 이상 시대적 조건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다. 특히 독일 식 ‘그린카드’ 제도(2000년), 국적법 개혁(2000년, 속지주의에서 ‘제한적 속인주의’로)과 2005년의 이민법 제정으로 주로 고숙련 전문 분야에서의 이주노동자 모집이 공식적으로 가능해졌다.

  생각건대, 이주 노동자 정책의 논리에는 크게 세 가지 흐름이 있다. 첫째는 노동시장 정책의 관점이고, 둘째는 사회통합 정책의 관점이며, 셋째는 문화사회 정책의 관점이다.
  우선, 노동시장 정책의 관점은 ‘GastarbeiterInnen’(손님 노동자)이란 말에서도 나오듯, 이주자들을 ‘일시적으로’ 머물며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신 임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라 본다. 이런 관점에서 단기 순환 원칙(Rotationsprinzip)과 가족 동반 금지 원칙이 나왔다. 즉 2~3년 정도만 일하고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노동력을 불렀는데 사람이 들어오고야 말았다.’라는 말이 있듯이 이주민들은 단순한 생산요소와는 달리 ‘사람’이다. 사람이란 나름의 욕구와 소망, 희망과 꿈을 가진 존재이며, 나름의 생각과 주장에 따라 행동을 하고 조직적 운동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태가 다소 복잡해진다. 또 노동력을 제공하며 살다 보면, 현지인과 일정한 관계를 맺기도 한다. 친구나 동료, 동지, 사랑하는 관계가 되기도 한다. 가족이 형성되고 자녀가 생기며 양육과 교육 문제도 부각된다. 문화적 갈등이 생기면서 이해와 조화의 문제가 부각되기도 한다.
  바로 이런 면에서 둘째의 사회통합(Sozial-integration) 정책이 나오게 된다. 물론 이 둘 사이는 배타적이지 않다. 상호보완적이다. 비록 몇 년 뒤에 본국으로 간다 할지라도 일단 현지에 사는 동안 사회통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외국인 배척 운동, 신나찌 운동 따위는 이런 점에서도 국가적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심지어 기업가들조차 ‘외국인 노동자’의 헌신을 칭송하면서 신나찌 세력을 비판할 정도였다. 그런데 사회통합 정책은 사실상 ‘외국인’(이방인)을 어느 정도 ‘독일화’(Germanisierung) 내지 ‘동화’(Assimilierung)하려는 것이다. 여기에 독일어/문화/평등 교육과 더불어 균등한 사회보장이 핵심이다. 이 정책에는 사회통합이 되는 만큼 ‘좋은 노동력’이 되어 사회 갈등도 줄고 산업 평화도 유지된다는 시각이 깔려 있다. 독일 노동조합들도 이 정책에 적극 동의한다. 심지어 이주노동자들도 독일 노동자들과 더불어 노동자평의회(Betriebsrat)나 산별 노조(Gewerkschaften)의 대의원이나 간부로 활동할 수 있게 했다(이용일 2006).
  그런데 여기에 일종의 자기 동력이 생긴다. 사회통합과 더불어 ‘장기 체류’하거나 ‘정착’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 좋은 노동력의 역할을 기대하고 사회통합 정책을 폈는데, 이제 돌아가지 않으려 해 더욱 사회통합을 필요로 하는 역설이 생긴 것이다. 결국 이주 노동자에게 문을 열자는 정당이나 사회단체의 요구와 더불어 이들을 필요로 하는 기업가들의 요구도 있었기에 갈수록 이주민들의 체류는 장기화했다. 3년 계약 종료 후 정부가 ‘추방’ 정책을 폈을 때 광부나 간호사들은 집단 저항을 조직하기도 했다. 좀 더 부드러운 ‘귀국 장려’ 정책에도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이제 많은 이주민들에겐 원래 고국보다 이주국(독일)이 더욱 ‘편안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귀국했다가도 다시 재이주를 하거나 아예 그것이 두려워 귀국하지 않기도 한다. 결국, 국가가 원하든 원치 않든 또 본인이 미리 계획하든 않든, 사람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정주’하기 ‘일쑤다.’ 그리고 나라에서 ‘불법’(미등록)을 단속한다 하지만, 결코 완벽하게 ‘통제’되지 않는다. 정도의 문제일 뿐이다. 사회통합 정책도 자기 한계가 있는 것이다.
  한편, 사회 ‘통합’ 내지 ‘동화’라는 용어는 마치 전술한 ‘관용’이란 말과 마찬가지로 이주노동자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기분 나쁜’ 말일 수 있다. 주어진 사회에 통합되거나 동화되어야 한다는 압박은 은연중에 당사자를 객체화하기 쉽고 잠재적 범죄자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더불어 고학력, 전문 기술 노동자들에겐 독일 외의 다른 나라들이 더 매력적으로 떠올랐다. 이른바 ‘두뇌 고갈’(brain drain) 현상이 심해졌다. 이런 배경 속에 셋째의 문화사회(Kulturgesellschaft) 정책이 부각된다. 여기서 말하는 문화사회 정책은, 이른바 ‘다문화 사회’(multikulturelle Gesellschaft) 또는 ‘대칭사회’(Parallelgesellschaft)와 친화성을 지니는 것으로, 다양한 출신의 이주자들 사이에 사회적, 문화적 공존과 조화를 꾀하는 것이다. 이 정책에서는 이주자들을 더 이상 ‘노동력’이나 ‘이방인’으로 보는 시각을 넘어 엄연한 사회 ‘구성원’으로 수용한다. 말하자면, 홍익인간 또는 사해동포주의에 입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각 구성원의 문화적 다양성을 존중하고 상호 이해와 소통을 넓히며,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풍요를 선물하는 사회를 바로 ‘문화사회’라 정의하고자 한다. 이는 근본적으로, 주인과 손님의 구분을 없애고, ‘모두 주인이자 모두 손님’이라는 시각에 기초할 때 그 진정성이 보장될 것이다. ‘이제 독일은 이주의 나라가 되었다.’는 말은 예전의 ‘노동력’ 시각이나 ‘이방인’ 시각, 즉 배타성을 지양하려는 측면을 말해준다. 하지만, 2005년 ‘이민법’을 보다 구체적으로 보았을 때, 이것이 ‘문화사회’ 시각에서 건전한 세계 시민 모두에게 문을 열고 받아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 면에서 2005년 이민법을 사회통합 정책의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다(송태수 2006, 이용일 2006). 특히 이주노동자들에게 언어, 역사, 문화 강좌 등 ‘사회통합 코스’를 의무적으로 수강하게 한 것이 그 증거다. 그러나 이민법은 사회통합 차원만 있는 건 아니다. 그 속에는 전술한 바, ‘문화사회’를 향한 싹들이 이미 내재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독일의 이주 정책은 크게 보면 지난 50년 간 큰 진전을 이뤄 오고 있으나, 노동시장 정책과 사회통합 정책, 문화사회 정책이 혼재하면서도 아직은 ‘문화사회’를 말 그대로 구현하기에는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책 변화의 과정에는 기업, 국가, 시민 사회, 노조, 정당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진지한 토론을 벌이고 특히 보다 개방적이고 진보적 사회 세력들이 정책 진보에 많은 기여를 해 왔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 이러한 독일 이주 노동자 정책이 가진 특성을 시기별로 보다 자세히 살펴보자.
  1950~60년대 독일의 초기 이주노동자 정책은 대략 5가지 특징적 기조를 유지했다. 1) 연방 노동청(Bundesanstalt fuer Arbeit)의 관할 아래 정부 간 공식 협약에 의거 노동자를 유입했다. 이로써 수익을 추구하는 민간 브로커의 개입을 최소화했다. 2) 노동허가가 독일 노동시장 상황에 따라 조절되었다. 3) 이주노동자는 독일 노동자와 동일한 노동법의 적용을 받게 했다. 4) 단기 순환 원칙에 따라 고용은 단기를 원칙으로 했으며, 고용허가는 1년 단위로 갱신되었다. 5) 이주자는 노동관청의 지속적 통제를 받았다(Pagenstecher 1994).
  1970년대에 들어 이주노동자의 ‘정주화’가 심해지고 오일 쇼크가 터지자, 한편으로 모집 금지(Anwerbestopp) 정책(1973. 11. 23)과 귀국 정책(Rueckkehrpolitik, 1982년)을, 또 다른 편으로 장기 거주 이주노동자 가족을 수용/통합(Integration)하는 정책을 편다. 사실 ‘정주화’는 1980년대까지 꾸준히 증가했다. 일례로 1967년엔 ‘외국인’ 181만 명 중 39.8%가 정주했고, 1973년엔 397만명 중 48.7%, 1978년엔 398만명 중 66.8%, 1988년엔 1980년의 445만명 중 68.6%가 정주했으며 1988년 당시 총 449만명 중 16%인 72만명은 무려 20년 이상 장기 체류하는 사람들이었다. 정주화 경향에는 숙련 노동력을 선호하는 기업의 이해관계도 기여했다.
  1991년의 새 외국인법에서는 체류 허가 기준이 강화되고 귀화 및 이중 국적 문제는 개선되지 않았다(Meier-Braun 1995). 독일 재통일과 더불어 유럽 통합, 소동구의 체제 변화가 심했던 90년대에는 이주노동자보다는 망명신청자나 난민 문제가 부각되었다. 네오 나찌에 의한 ‘외국인 증오감’도 극대화되었다. 높은 실업률과 함께 외국인 증오감은 이주노동자의 유입을 제한하는 데 기여했다.
  그 뒤 정보 사회 내지 지식 기반 사회의 도래와 더불어(2000년 하노버 세계컴퓨터 박람회 개최), 정보기술 관련 전문 인력이 1998~1999년 사이에 약 10만 명이 부족하여 2000년엔 일종의 ‘Greencard 조항’을 만들었다(주재순 2007). 그러나 이 그린카드는 미국의 그린카드(영주권)에 비하면 매력이 적어 2006년엔 단 17,931 명의 전문인력이 Greencard를 받아 독일로 입국했다. 특히 독일 사회의 고령화와 동시에 엔지니어(건축 기사, 전기전자 기술자 등)와 학자, 의사 등 전문 인력의 대량 해외 탈출은 위기의식을 드높여 부분적 개방 정책을 촉진했다. 일례로 2005년에 취업 차 해외로 나간 독일인은 약 14만 5천명으로 (그 중 의사만 해도 1만 2천명), 2002년에 비해 25%나 늘어 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다. 특히 2005년은 1968년 이후 처음으로 해외로 나간 독일인 수가 귀국자 수를 웃돈 해로 기록되었다(WSJ, 2007.1.3). 이런 맥락에서 컴퓨터 전문가뿐만 아니라 계절노동자, 계약노동자, 국경왕래노동자, 신 초빙노동자, 간병인 등 새로운 이주노동자 유입이 증가하고 있다.
  결국, 해외의 고급 인력에게 문호를 개방할 필요성과 더불어 독일 사회도 보다 개방적으로 변해야 한다는 사회적 분위기에 힘입어 오랜 논란 끝에 그간의 외국인법(Auslaendergesetz)이 2005년부터 이민법(Einwanderungsgesetz)으로 변했다. 이에 따르면 유럽연합 비회원국 국적자에게도 전문 인력(엔지니어, 컴퓨터 기술자, 연구원, 학자, 기업 간부 등)인 경우 취업 이민과 영주권을 공식 허용하며, 독일 대학에서 학위를 마친 이들도 1년간 더 머물며 취업할 수 있게 했다. 기술 수준이 낮은 외국인 노동자도 독일 기업에서의 취업을 증명하면 체류허가 신청이 된다. 그간 분리되었던 노동허가와 체류허가 절차도 통합했다. 한편, 범죄 혐의가 없어도 향후 테러나 종교적 극단주의를 유포할 가능성이 있는 정황 증거만으로도 외국인 추방이 가능하도록 한 것은 집중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4. 이른바 ‘불법’(미등록) 노동자에 대한 정책

 각국 정부는 불법 이주를 막기 위해 국경 통제와 범죄 단속을 강화하지만 수요가 있는 한 이를 근절하기란 쉽지 않다. 현재 독일에는 미등록 노동자가 최소 10만 명에서 최대 100만 명까지 추정된다(주재순 2007). 한국도 2007년 현재 전체 체류 외국인 100만 명 중 이주노동자는 45만 내외이며 그 중 미등록노동자는 약 50%(25만명)에 이른다.
  몇몇 통계를 통해 국제 비교를 해 보면 정부의 정책에 따라 미등록 노동자 비중이 의미 있는 차이를 보임을 알 수 있다. 한국의 미등록 이주노동자의 비중은 세계적 수준인데, 국가별 미등록 이주노동자 비율을 살펴보면 분명해진다. 이러한 국제 비교를 단순 시점 비교가 아니라, 한국에서 1992년 이후의 산업연수생제로부터 1998년 연수취업제를 거쳐 2003~4년 고용허가제로의 변화를 반영하는 동태적 국제 비교를 하면 더욱 흥미롭다(강수돌 2007b, 고용허가제와 미등록이주노동자, 2007년 한독경상학회 국제학술대회 발표문).


<표1> 국제 이주노동자 중 미등록자 비율의 국가별, 제도별 비교
국가싱가폴
(고용허가제)독일
(노동허가제)대만
(고용허가제)일본
(기능실습제)한국
(산업연수제 1992-1997)한국
(연수취업제 1998-2002)한국
(고용허가제 2003-2007)%3.26.57.442.269.069.835.3
자료: 유길상(2000), 이규용 외(2005) 및 법무부 각 연도 자료 참고하여 자체 계산

  독일도 미등록 노동자를 ‘강제 추방’하기도 하지만 한국 정부나 공무원이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야만적’이진 않다. 예컨대, 2007년 2월의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 참사 사건은 부끄럽게도 그런 야만성을 세계적으로 알렸다. 반면 여러 노동조합이나 시민/사회/종교 단체들은 이주노동자와 연대하여 문제 해결에 적극 개입했다. 이들은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려, 화재 참사 피해자 46명을 즉각 보호해제하고 체류자격을 변경(G-1 비자로)할 것을 법무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참사의 원인이 이주노동자를 비인격적으로 대우한 보호소 당국의 무책임성에 있음에도 관련 당국은 진상을 은폐, 왜곡하기에 바빴다. 게다가 9명의 사망자를 제외한 46명의 사고 피해자들 중 16명이 병원 치료를 받는 중인데도 예컨대 Ferrando Weerahana씨와 YU Jianqing 씨를 청주 외국인보호소로 재구금해버리고 말았다. 또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당시 처참한 사고 기억 때문에 정신적 고통을 호소했다.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며 유독가스에 질식해 죽어간 동료들의 비명 소리로 잠을 못 이루는 피해자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감옥보다 못한’ 보호소에 재수감되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치료를 받고 안정을 찾을 수 있게 보호 해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법무부는 이주노동자들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건 발생 48일만인 2007년 3월 말 영결식이 있었고, 그 다음 날 열린 화재 참사 희생자 49재 집회엔 네덜란드의 잔 폴 슈미트 ‘추방자 보호소 감시단체’ 사무국장이 참석했다. 그는 2005년에 네덜란드 공항의 외국인 보호소에서도 유사한 화재사건이 발생해 11명의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사망하고, 15명이 부상당한 사건에 대하여 보고했다. 당시 네덜란드 정부는 네덜란드 안전국(DSB)에 의한 1년의 조사 끝에 피해 규모 확대에 정부의 책임이 있다고 발표하고, 법무부장관, 주택부장관이 이 문제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또 화재발생지에 있었던 생존자 39명에 대해 정식으로 체류자격을 부여한 바 있다. 네덜란드 당국은 한국과 달리 ‘책임성’ 있는 행위를 한 것이다. 이 모든 사태의 배후엔 많은 NGO와 언론에서 이주노동자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며 정부에 압박을 가한 사실이 있다(프레시안 2007.4.2). 슈미트씨는 “가장 큰 문제는 미등록 이주노동자들의 권리에 대한 언급과 책임을 정부가 회피하는 것이며, 이주노동자도 인간인 이상 어떤 곳에서도 인권은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실 노동이민을 불법화하는 강력한 입법 조치는 이주 노동자들의 근로조건만 불리하게 해 고용주가 더 낮은 임금으로 이들을 고용할 수 있게 해줄 뿐이다. 밀입국 비용도 높인다. 밀입국에 성공하더라도 정규 노동시장에는 접근하기 어렵고, 노동법의 보호도 받을 수 없다. 통상 동포 업자에게 고용돼 뒷골목 노동시장에 자리 잡게 된다. 인권 및 노동권 침해는 불을 보듯 뻔하다.
 한편, 세계적으로 지금까지 동원된 어떠한 수단도 이주를 막지 못했다. 국가 정책과 이주 논리가 충돌하는 것이다. 이는 정부가 이주자들이 부당한 착취를 당하지 않고 일할 권리를 보장하면서 동시에 시민의 삶도 보호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함을 일러 준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부분의 정치인은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반(反)이민 정서를 이용하려 든다. 선거 때마다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극우 정당이 바로 그것이다.
  본질적으로, 각 사회마다 삶의 안정성이 뿌리 뽑히게 되는 잘못된 현실, 특히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한 농촌 공동체의 파괴가 범지구적으로 이주 노동을 강제한다. 그러나 모두 합법적 경로를 따라 이동할 수 없기에 미등록자는 증가하게 되어 있다. 불행히도 신자유주의 현실은 각 사회를 ‘20대 80사회’로 양극화하는 경향이 있다. 80%에 속하는 사람들 중 ‘외국인 증오감’에 빠진 이들은 그 내면의 고통과 좌절감을 ‘외국인’에게 투사하기 쉽다. 특히 미등록 노동자나 실업자는 그들의 공격성에 가장 강력한 표적으로 노출된다.
  따라서 미등록 문제를 포함한 이주노동자 문제를 푸는 방법은 1) 가능한 한 합법 취업의 통로를 넓힘과 동시에 ‘문화사회’를 위한 사회 교육을 광범위하게 실시해야 하며, 2) 더욱 근본적으로는 각 사회에서 굳이 ‘뿌리 뽑힌’ 삶을 살 필요가 없게끔 사회경제적 자립성을 높여나가야 한다. 이 과정에 이른바 ‘선진국’은 재정 지원이나 기술 지원을 적극 할 필요가 있다.


5. 시사점: 한국 사회를 ‘업그레이드’ 하려면?

  우리가 독일의 이주노동자 정책을 살피는 것은 결국 우리가 독일 사례를 일종의 ‘거울’로 삼기 위함이다. 우리 자신이 독일에 갔을 때 우리는 “나도 차별 받지 않고 무시당하지 않으며 독일 사람과 평등하게 살고 싶다.”고 소망한다. 미국이나 일본을 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같은 마음을 한국에 들어온 중국, 동남아 등의 이주노동자도 동일하게 갖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나도 같은 인간이다.”라고 하는 마음, 바로 이것을 누구나 지니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은 지난 1980년대까지 주로 해외에 노동력을 수출하는 나라였지만, 1980년대 말 이후 해외의 노동력을 더 많이 도입하는 나라로 전환되었다. 일례로, 1987년 봄 국내 여러 일간지에는 ‘서울 강남에서 일하는 필리핀 여성 가정부’에 대한 기사가 실리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방식으로 해외에서 한국으로 유입된 노동자는 1990년만 해도 2만 1천여 명 규모였으나 2007년 8월 현재 40여만 명으로 무려 20배나 늘었다. 3개월 이상 체류 외국인 규모도 72만여 명에 이르고 갈수록 국제결혼도 증가한다.
  국제결혼의 비율은 2000년 3.7%에서 2005년 13.6%로 증가했고, 농어촌 지역은 2005년 현재 35.9%에 이를 정도다. 결혼 이민자는 2002년 3만 4710명에서 2007년 10만 4749명으로 5년 새 3배, 영주권자는 같은 기간 6,022명에서 1만 5567명으로 2.5배 늘었다. 이런 추세라면 2020년이면 국제결혼 이민자 2세만 167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하게 된다(정귀순 2006).  
  나는 여기서 우리가 이주노동자 문제에 올바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속지주의나 속인주의, 인종주의, 민족주의, 국가주의 모두를 넘어, ‘우리 모두는 어디에 살건 주인이면서 동시에 손님’(Everyone is everywhere a guest and a host as well.)이라는 ‘겸손한 주체성’(modest subjectivity)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겸손한 주체성’은 결국 ‘자기책임성’(self-responsibility)을 전제로 한다. 단순히 한복을 입히고 전통 예절을 가르치는 것으로 ‘다문화사회’ 운운하는 것은 너무나 오만하고 피상적인 접근이다(강수돌 2007a). 또, 기존의 ‘국익’ 담론은 국가주의나 민족주의의 편협성을 재생산하기 쉬우며, 단순한 ‘인권’ 담론은 이주노동자를 희생자로 대상화하거나 피해의식의 틀 속에 가두기 쉽다. ‘이주노동자가 어디로 가건, 주체적 사고와 행위를 통해 올바른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형성한다.’는 논리 위에 구조와 과정을 ‘재형성’할 필요가 있다. 이런 기본 관점이 널리 공유된 위에 모두가 공존공생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문화사회’가 될 수 있다.
  요컨대, 이주노동자를 더 이상 ‘노동력’이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 내지 ‘삶의 주체’로 인정한 위에서(강수돌 1996), 선택과 이동의 자유 보장, 합법 취업과 정주 기회의 확대, 주기적 사면 조치와 더불어 노동의 인간화 등 여러 정책들을 적절히 결합할 때, ‘정책적 빈틈’은 지양되고 더 이상 ‘불법의 효익’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만성적 불법화’의 덫에 걸린 한국의 미등록 이주노동자 문제도 자연스레 풀릴 것이다(강수돌 2007b). 바로 그것이 ‘노동력’의 길이 아닌 ‘사람’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일 이주 정책의 역사에서 보듯이 정책 변화는 결코 하루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뿌리 뽑힌 삶’을 강요하는 신자유주의 물결이 온 세상을 강타하는 만큼 이에 올바로 맞설 역량과 지혜가 필요하다. 노동자 자신 및 일반 시민, 노조와 시민사회 단체, 그리고 정당 등은 중요 변수가 된다. 이들이 나서서 이주노동자의 권익과 필요를 반영하려면 아래로부터의 힘과 위로부터의 힘을 적절히 결합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변화는 가능하다. 또 이러한 소통과 연대를 통해 모두 참된 ‘사람의 길’을 갈 수 있을 때, 비로소 이주민들이 본국과 이국에서 경험한 다양한 형태의 상처들(Trauma)이 서서히 치유되고 그 삶의 건강성도 다시금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강수돌(2007a), ‘외국인’에 한복 입히면 다문화사회 되나?, <오마이뉴스>, 2007. 4. 25.
강수돌(2007b), 고용허가제와 미등록 이주노동자, <2007년 한독경상학회 국제학술대회 발표자료집>, 2007. 9. 14. 상지대.
강수돌(1996), <외국인 노동자 고용 및 관리 실태와 정책 대안: 기업적 합리성과 사회적 합리성의 비교 관점에서>, 한국노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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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귀순 2006), 정부의 이주정책에 대한 총괄적 평가, 이주노동자인권연대(편), 2006년 심포 자료집, <정부의 이주정책: 돌아보기와 뛰어넘기>, 2006.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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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의팔(2004), 나는 무의식 속에서 이주노동자를 무시해왔습니다,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 최의팔 칼럼, 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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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genstecher, Cord(1994), Auslaenderpolitik und Immigrantenidentitaet. Zur Geschichte der Gastarbeit in der Bundesrepublik, Berlin: Dieter Bertz Verla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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