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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의 인생”: 타자 공동체 속의 예술

글: 문영민

00 마석

서울에서 마석으로 가는 산등성을 넘어가는 도로 주변에는 골프장과 드라이브 레인지가 있다. 말끔하게 처리된 조경 너머 멀지 않은 곳에 마석의 가구공장단지의 파란 지붕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 허리턱까지 깎아 들어가 잠식한 무질서하게 배열된 공장건물들의 휑한 풍경과 공장 단지를 둘러싼 작은 아파트단지가 보인다. 공장단지에 들어서면 골목과 건물 벽을 둘러싼 쓰레기와 공업 폐기물들이 즐비하다. 마석 초등학교의 거칠은 운동장은 그곳을 둘러싼 공장들의 활짝 열린 창문들에서 스프레이 페인트의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 첨단과학기술과 인터넷 강국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열악한 작업환경과 주위환경은 1970년대의 모습 그대로이다. 한스 벨팅은 한국과 같은 기술이 발전된 나라는 제3세계도, 서구도 아니기 때문에 문화적으로 스스로 고립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한 면에서 마석은 이중으로 고립된 곳이다. 더 이상 개발도상국이 아닌 국제적 경쟁력을 구가하는 한국에서 접한 마석의 모습은 개발도상국의 잔재가 여실히 남아있는 곳이다.

건물과 구조된 공간들은 정치적, 문화적, 행정적 제도를 반영하며, 그 공간적 기획은 정치경제적 권력의 존재를 상징한다. 이러한 면에서 마석의 가구공단의 건물들은 물리적 보존상태의 심각성과 무작위적으로 연장된 부수 공간들, 위험스럽게 방치된 계단과 출입구와 펜스가 없는 베란다, 그리고 그 외부를 둘러싼 공업쓰레기들의 존재를 통해 그러한 정치경제적 권력의 관심 밖에 오랫동안 위치해왔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대도시 중심부에 위치한 고층건물들이 모더니티와 자본의 축적을 상징한다면, 그에 대비하여 서울의 주변부에 위치한 마석의 공장건물들은 권력의 관심의 부재와 투자의 결여의 상징으로 존재한다. 비로소 마석에 부여된 권력의 시야는 개발의 전망으로 확연히 드러나는 한편, 그곳의 노동자들은 그들의 불확실한 미래의 삶의 터전에 대해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해보지 못하고 있다. 아니, 그들에게는 구체적인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고 있다.


01 Inside Out

작년 11월의 정부의 불법체류자 대규모 단속 직후에 믹스라이스가 마련한 토크쇼에 참여했던 이주노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견해를 같이 했던 점은 마석이 개발되면 공장을 따라 이사를 가던지 아니면 고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막연한 생각들이다. 믹스라이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한국인 스스로가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는 마석은 한국 내의 ‘외부’이다. 이주노동자들에게는 그 낙후한 한국의 ‘외부’는 고국도 한국도 아닌, 또 다른 제 3의 외국과 같은 곳이다. 그들이 구사하는 제한된 한국어 속에서 드러나는 것 중 괄목한 점은 그들의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자세와 소수민으로서의 결속력이다. 국제경제체제의 하부에서 부유하는 그들이 마석을 아시아의 다언어를 구사하는 일종의 초국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장소라는 면에서 흥미롭게 여긴다는 점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마석의 개발 이후 또 다시 이주하여 잠정적으로 정착할 미지의 그곳이 마석과 같이 다언어의 공동체적인 ‘외부’가 될 수 있는지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다.


02 만남

믹스라이스와 함께 마석을 방문한 날은 마침 그들은 야유회를 가질 예정이었다. 나는 그들을 공장이나 그들의 주거환경에서 처음 만나지 않았다. 맑은 날 집 앞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야유회 갈 시간을 여유롭게 기다리고 있는 그들을 처음 만났다. 대절한 버스를 타고 한시간 가량 이동해서 저녁식사를 할 때 알게 된 것은 그것은 야유회가 아니라 정부단체에서 주관한 다문화영상체험 프로그램이었다. 의무적으로 참여를 강요하는 이 프로그램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물놀이와 수구와 족구를 즐기고, 시멘트 바닥에 앉아 맥주와 과자를 먹으며 그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그들과의 첫 만남에서 여가시간을 가지며 그들이 회고한 과거와 현재의 직장에 대한 비교와, 미래의 꿈에 대해 밝게 피력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을 다행이라 생각했다. 맛있는 것과 즐겁고 재미있는 시간을 보내기를 좋아하고, 미래는 지금보다 나을 것이라고 희망하는 그들은, 미디어에서 재현되어 왔듯이 시청자의 도움이 필요한 ‘가엾은’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그들의 밝게 살려는 의지의 모습들은 그들이 설립한 축구팀 에베레스트 FC나, 그들이 직접 촬영하고 편집한 영상일기, 그리고 본 전시의 토크쇼 등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하지만 토크쇼에서 보이는 그들은 일정간 피폐한 모습들이기도 하다. 지친 얼굴들이다. 그것은 11월의 단속 직후였고, 축구선수들을 포함한 가까운 이들이 대거 잡힌 뒤 추방되었고, 그들 역시 그렇게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03 시각

믹스라이스는 애초부터 이주노동자들을 동정심 어린 시선을 유도하는 미디어의 편협한 재현방식에 저항해왔다. 그것은 이주노동자를 멀리서 온 불우한 이웃 정도로 느끼게 하며, 이따금 극심한 착취나 폭력적인 상황에 처한 이들의 경우에 션세이셔널한 뉴스감에 그치고, 결국은 한국사회 안의 그들의 타자성을 공고히 하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믹스라이스와 같이 특정한 그룹의 주체들과 협업을 통한 작업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동정심이 아닌 진지한 관심과 열의 없이는 불가능하다. 믹스라이스 작업의 시초는 성남프로젝트와 같이 가파른 경제성장과 더불어 소외되고 망각된 도시와 주변의 현실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들은 예전에 간혹 볼 수 있었던 외국인은 거의 모두 백인이었다는 것, 그리고 백인은 곧 미국인을 의미한다고 잘못 인식했던 것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한다. 현시점까지 한국의 외국어 교육은 영어에 극심하게 편중되어 있고, 경제, 교육, 사상 전반에서 서구 지향적이었음을 반추해 본다면 그러한 잘못된 인식이 비롯될 수 밖에 없었다. 믹스라이스가 전지구화의 신호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인식한 가장 두드러진 변화의 모습은 바로 지난 세기 말 금융경제난을 겪은 뒤 금세기에 들어 부쩍 늘어난 외국인, 즉 아시아에서 온 비백인 이주노동자들의 출현이다.

믹스라이스는 이들 이주노동자들과의 협업을 통해 다방면의 활동을 추진해온 그룹이다. 그들은 전지구적 경제구조 속의 노동력의 움직임으로 인한 정체성의 문제, 특히 한국과 같이 단일민족을 고집해온 사회에서의 정체성과 민족주의는 공공의 영역에 어떠한 의미를 미치는지를 묻고 있다. 나아가서 그들의 활동은 인권의 문제, 초국가적 연대와 국적의 가능성, 그리고 세속적 의미의 작가의 역할이란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04 방법

믹스라이스는 사회개입적 활동의 프로젝트와 그것의 사진과 영상 기록, 그리고 그러한 활동을 토대로 한 만화, 벽화, 출판물, 글 등을 통해 여러 각도에서 ‘우리’ 안의 타자라는 문제를 접근해왔다. 명동성당 앞 농성천막을 통해 중계된 믹스라이스 채널, 영상일기, 공장에서 많이 듣는 말들로 만든 노래 <섞인말들>이나 토크쇼를 통해 그들이 발언할 수 있는 장을 만든다. 그들의 작업은 포로젝트의 기록을 통한 다큐멘타리적 사진과 영상작업의 영역에 머물지 않는다. 모든 다큐멘타리는 주관적의 입장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을 고려한 듯, 그들이 2006 광주비엔날레에 출판한 글에는 이주노동자들과의 지속적인 관계로 얻은 지식과, 그들의 고국 방문을 통해 관측한 모순적인 발견들에 대해 작가들의 양가적 입장을 우회적으로 피력하기도 한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도큐멘타리라고 부를 수 없는, 개인적인 느낌들을 포함하는 뉘앙스의 글로서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관심과 동시에 그들의 실리의 추구가 가져오는 부조리에 대한 착잡함을 암시한다. 그러한 면에서 도큐멘타리적 ‘중립적’ 시각을 드러내어 거부하기도 한다.

빨랫줄에 널린 빨래들과 헌 옷장들을 배경으로 열리는 토크쇼의 자리에는 최근의 단속으로 추방되어 참석하지 못한 에베레스트 FC 축구선수 네명의 사진이 서랍장위에 놓여진 골판지 위에 서있다. 조명 장치들과 마이크, 그리고 임시테이블을 제외한 전혀 꾸미지 않은 삶의 모습 속에서 진행되는 토크쇼는 브레히트적 어법으로 연극적인 가공성을 최소화하려 한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대중의 척박한 이해가 신문과 뉴스매체가 전달하는, 소위 ‘사실 그대로’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지는 편협한 소개 방법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토크쇼는 미디어에서 결여되는 노동자들의 실제 모습과 목소리를 최소한의 예술적 여과를 통해서 주류사회에 만연한 그들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에 도전하고 있다.

믹스라이스의 일련의 만화들은 얼핏 보기에 소위 코믹저널리즘이라고 불리는 쟝르와 유사성을 지니는 듯 하다. 그러나 이 만화들은 저널리즘이라고 하기에는 ‘보도’된 사건들의 내용 자체가 센세이셔널한 것과는 거리가 먼, 너무나 일상적이며 소소한 것들이다. 일련의 코믹저널리즘적 만화들이 서사적이라면, 믹스라이스의 만화는 단편적이며 상황적인 짧은 에피소드들이다. 마슘의 어머니가 그의 아들이 잡혀서 추방되서라도 하루 빨리 보고싶다는 표현을 한다거나, 실제로 잡혀 추방된 마슘이 공항의 VIP 라운지에서 ‘대접’받았다고 여러번 반복하는 모습을 보면 확실히 코믹한 요소들도 다분히 있다. 그러나 동시에 단순히 웃어넘길 수 없는 씁쓸한 느낌이 배어있다. 만화 속의 등장인물들은 실제 인물들과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투박하고 표현적인 필력으로 묘사된다. 실제 인물을 알아볼 수 없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은 여느 이주노동자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연극 <불법의 인생>은 퍼포먼스와 사회개입적 행동의 간극을 오가는 믹스라이스와 이주노동자들과의 유연한 관계, 그리고 향후 가능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사실 애초부터 지금까지 믹스라이스와 이주노동자들의 문화활동들은 대개 믹스라이스가 제안해왔다. 축구팀의 경우 실제 축구선수 출신의 노동자들이 주축이 되기도 했지만, 이번 연극은 처음으로 노동자 측에서 제안해 온 활동이어서 더욱 큰 의미가 있다. 엄밀히 논하자면 믹스라이스라는 콜렉티브의 정체성의 문제가 대두되는 지점이다. <불법의 인생>을 제외한 모든 활동이 믹스라이스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다시 말해 이주노동자들은 협업에 참여의 기회가 주어진 대상이라는 것이다. 잠정적이며 유동적인 관계를 지향하는 것이 그들이 계획하는 바인지는 모르나, 미래에는 노동자 주도의 활동이 다각도에서 제시되는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까.

연극 연출의 주축은 방글라데시 출신의 이주노동자들이다. 이 연극은 인도 및 필리핀 등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와 범세계적으로 활성화된 커뮤니티 연극들과 관계가 있다. 그것은 주변화된 주민들이 공유하는 이슈들을 극화하여 그들의 목소리를 발화하는 기회로서 이미 자리매김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커뮤니티 주도의 연극들은 주류 연극 및 문화계의 인식 바깥에서만 맴돌아왔다. 일반적으로 커뮤니티 연극의 소외됨은 그들이 전문성을 결여했다거나 학계의 ‘보편적’ 미학적 기준의 적용으로 인한 한계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이유로 커뮤니티 연극이 정부산하 문화재단 등의 기금을 받아 활동하는 것을 거의 불가능한 현실이다. 그들이 기금을 수여하게 된다면 그것은 예술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지역공동체 계발과 같은 교육 및 사회활동의 차원에서 이루어질 공산이 크다. 이러한 상황이 암시하는 것은 커뮤니티 연극의 예술적 판단기준은 다시각적 방향에서 찾아야한다는 점이다.

전시에 연극 연습장면을 포스터용으로 찍은 사진들과 영상을 전시하는 과정에서 전통적 의미의 저작권과 같은 문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노동자들의 주도하에 쓰여진 시나리오와 연출된 극을 믹스라이스의 사진으로 전시된다는 점에 대해 연극 감독은 믹스라이스가 수년전 명동성당 농성 때부터 가까이 연계되어 있어 왔고, 그 이후에도 그들의 “여러 상황과 과정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진 작가가 아닌 믹스라이스가 촬영하고 전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즉 작가들과 연극감독 양측에서 작가적 권위 내지 자존심은 유보되며 상호 신뢰에 의해 작업과 그 재현이 이루어지고 있다.

심지어 사진영상매체를 통해 노동자들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에 대한 염려에 대해서도 연극감독은 그러한 위험부담을 인식하고 고민하는 행동 자체가 공유해야 할 책임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특히 최근 심화된 단속의 위험 때문에 연극을 지속하기가 더 어려워졌다고 토로한다. 감시의 시선을 피부로 느끼게 된 이 시점 전시될 사진 속 인물들의 얼굴을 일부 종이테이프로 가려야 할지도 모른다는, 일종의 자가검열의 상태까지 도달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섬약한 위치를 확인하게 된다.


05 분단

첨단기술 시대의 이산의 주체들은 정보네트워크를 통해 고국의 정보를 얻고 연예문화를 즐기고 있다. 북미의 경우만 해도 한국인 이민자나 유학생 등이 접시안테나를 통해 실시간으로 한국 방송을 시청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지 이미 오래다. 한국내의 외부인 마석과 같이 고립된 곳에서 이주노동자들 역시 접시안테나로 그들의 고국의 방송을 접하고 있다. 기실 마석의 풍경 중 빼어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낡은 공장 가건물의 주거시설 그리고 인근의 단층 주택가의 벽과 지붕에 마치 버섯처럼 돗아나 있는 접시안테나들이다.

일반적으로 북미의 슬럼은 디트로이트와 같이 버려진 대도시의 중심부에 자리잡기 때문에 가운데가 푹 꺼진 ‘도너트’형의 도시를 이루는 한편, 유럽의 경우는 이민자와 실업자들이 거주하는 빈민 고층 아파트들이 도심 외곽에 자리잡아 있기 때문에 ‘접시’모양의 도시형태를 이룬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 마석의 이주노동자들의 주거형태는 대개 지하나 단층주택이므로 뒤짚힌 접시나 심지어는 엎어진 화분의 도시형태로 볼 수 있다. 그들은 뒤집힌 접시 형태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서울 외곽에서 접시안테나를 통해 고국과 수신하고 있다.

여기서 디지털 분단이 의미하는 냉혹한 현실을 재고해 볼 수 있다. 한국에 입국하는 많은 서구인들은 인터넷의 활성화를 이용하여 많은 정보를 손쉽게 취득한 뒤 직장과 거주지 마련 등의 문제를 상당부분 자국에서 해결한 상황에서 들어오게 된다. 반면 이주노동자들은 정보의 부재로 인해 브로커등에게 거액의 수수료를 낸 후에야 입국할 수 있으며, 그 후에도 여러가지 곤경을 겪게 되기 쉽다. 입국 후 그들이 얻는 일자리는 한국인이 원치 않는 3D (dirty, dangerous, demeaning) 직종이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결국 서구인들과 아시아 출신의 이주노동자들이 보여주는 입지 조건의 크나큰 차이는 상당부분 그들의 인종, 국적, 그리고 디지털 정보에 대한 접근의 분단으로 결정지어버리며, 시종일관 상이한 사회적 위치를 점유하는 상황으로 굳혀져 버린다. 다시 말해서, 접시안테나를 통해서 모국의 방송을 접하고 있는 이주노동자들은 스펙타클의 사회 속에서 소비하면서 상상의 공동체에 참여하고는 있지만, 막상 자신이 처하게 될 위치를 결정짓는 자신보다 커다란 사회시스템에 대한 정보는 거의 결여된 상태로 한국에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패턴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정보의 세계에서 해커의 기술과 그것의 침투를 막으려는 기술은 세계를 다시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하였다. 해커는 “모든 이가 자유롭게 지식의 실질성에 근접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취득하는 능력과 정보 역시 자유롭게 허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방의 전제조건은 지식과 그 실질성에 희귀함을 부여하는 계급적 규율을 없애야 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서, 사이버공간의 정보의 전지구적 공유가 실현되지 않는 이상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노동자는 계속 프리미엄을 지불하고 노동권을 얻게 되며, 그 값비싼 댓가 이상을 얻기 위해 친족들과 별거를 무릅쓰고 불법체류자로 남게 될 것이다.


06 윤리

1998년 니콜라스 보리오Nicholas Bourriaud가 발표한 <관계적 미학>은 참여와 협업을 통해 이루어지는 유형의 예술을 설명하는 중요한 개념적 틀을 제시한 바 있다. 관계적 미학으로 설명될 수 있는 예술의 행위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을 지닌다. 첫째, 참여하는 주체를 ‘액티베이트’ 시키고, 둘째, 작가들은 그들의 창작적 입장을 일정간 양보하고, 셋째, 집단적 책임의 인식을 통한 커뮤니티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발로를 근거로 한다. 믹스라이스의 경우 역시 보리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예술적 재현 대신에 일상성 속에 예술적 에너지를 실험적으로 실현하는, 이른바 ‘구조된 상황’을 연출하며, 그것을 통하여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모색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관계적 미학 혹은 사회적 참여를 전제로 하는 예술 실천에 대한 비판적 쟁점들 역시 꾸준히 전개되어 왔다. 그것은 크게 몇가지로 집약될 수 있다. 그것은 첫째, 작가들이 사회에서 소외되고 억압된 소수계층에 있어서 메시아적 입장을 취한다거나 (로버트 스토어), 커뮤니티를 대변하는 권위를 “착복”함으로써 정치적, 전문인적, 도덕적으로 스스로의 입지를 강화한다는 주장 (피에르 부르디외); 둘째, 정치적으로 일관성을 띈 커뮤니티의 주변화된 입지를 향상시킨다기보다는 오히려 공고히 하며, 결국은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고 보는 견해 (권미원); 작가들의 진정성과 진지한 태도를 순진함이나 지적인 취약점 혹은 비판성의 결여로 보는 경향 등이 있다 (핼 포스터).

상기한 비판점들이 공통적으로 만나는 지점으로서, 커뮤니티에 개입해서 이루어지는 수행성의 작업의 가장 큰 난점이자 비판의 소지는 위계질서에 입각해서 실천된다는 것이다. 믹스라이스에게 이러한 관계의 소지가 있냐는 물음에 그들은 위계질서에 저항하지만 그것이 파생된다면 그것은 그들이 작가여서가 아니라 한국인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작가들은 동시에 한국인이며 작가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이주노동자들에게 이중으로 특권층에 놓여있는 유리한 위계의 입장에 있는 상황이라 볼 수도 있다.

한편, 보리오가 관계적 미학의 사례로 드는 작업들은 대체적으로 작가와 관객 사이에서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 즉 작업의 수용 과정에서 관객이 “액티베이트”되는 사례들이다. 믹스라이스는 관객과의 관계보다는 한국사회의 타자인 이주노동자들과의 관계에 주력하고 있으며, 그 과정이 전시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예술적 재현”으로 전환한다. 즉, 믹스라이스의 작업은 그 전개상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부분은 이주노동자들과의 지속적인 관계 속에서 그들의 일상 속에서 친숙한 관계를 형성하고 대화를 나눈 뒤, 어느 결정적인 순간 구조된 상황을 연출하여 이주 노동자들이 작업 속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은 보리오의 관계적 미학보다는 그랜트 케스터가 피력한 대화적 미학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대화적 미학은 특정한 타자화된 주체들, 정치적으로 일관성을 지니는 커뮤니티와의 대화와 협업을 통해 그들의 권익을 사회에 홍보하여 심도 깊은 이해와 개선책을 추구하는 일상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두번째 부분은 언급한 바와 같이 전시장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타자와의 관계를 재현하는 문제, 그리고 그것을 공공영역에 출판물이나 웹사이트 등으로 전파하는 등의 과정이다.

이러한 활동 방식의 특성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질문들은 매우 중요하다. 믹스라이스는 협업 이후의 전시와 같은 형식을 통하여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들릴 수 있게끔 하는가 아니면 그들은 노동자들을 대신하여 발화하는 입장을 차지하는가? 그러한 협업을 통한 결과물들, 토크쇼, 연극, 만화 등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믹스라이스는 그들의 활동이 미술 바깥의 영역에서 이루어진다는 이유 때문에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전시장으로 환원시켰을 때, 심지어 협업에 참여한 이주노동자들은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오프닝과 전시를 관람하러 오는가? 협업에 반드시 필요한 진정한 관심과 감정이입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그것은 작가들과 노동자들 사이의 사회적 차이를 부인하게 하는 장치로서 작용하는 것은 아닌가? 비록 동정심을 유발하는 방식의 재현에 저항하더라도,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문화활동을 통해 그들이 어떠한 변화를 겪어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게끔 기대한다는 것 역시 그들을 대상화하는 소지가 있는 것은 아닐까? 궁극적으로, 작가들과 이주노동자들과의 관계는 어떠한 성격을 지니는가? 친구인가? 그들의 삶과 현실에 대해 관심있는 한국사람인가? 그들의 억울하고 불쌍한 상황을 이용해 작업하고 커리어의 발전을 도모하는 작가인가? 작가들은 노동자들로부터 무엇을 알고 배우게 되었나? 진정한 의미의 서로의 배움은 어떻게 이루어지나? 이 모든 질문들은 사회적 타자와의 접촉을 기본으로 이루어지는 협업의 작업에 늘 제기되었던 질문들이며,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 한국사회에서 믹스라이스만큼 장기간 지속적으로 투철하게 작업을 해온 이들이 드문 상황이기 때문에 더욱 고려해봐야 할 성격의 질문들이다.

상기한 잠재적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믹스라이스의 활동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그들은 이러한 비판점들을 상당 부분 숙지하고 있다고 여겨지며, 그들이 스스로 기대했던 바에 못미치는 실망의 순간들을 이미 경험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믹스라이스의 활동은 박애정신에 입각한 핑크빛의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이주노동자들의 삶에 다가설수록 그들의 실체를 알게 되며, 그들 개개인의 분열적인 모습과 귀국 후 기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유혹에 빠진 전직 노동자 겸 액티비스트들의 모순적인 모습을 목격하며 그들의 기대했던 것과 다른 현실의 냉혹함을 확인할 뿐이었다. 어쩌면 후기자본주의체제가 완전히 자리잡지 않은 국가에서 온 그들이 한국인 ‘우리’들보다는 ‘순수’한 사람들일 것이라는 기대감 내지는 이미지를 그들에게 투영했던 것은 아닐까? 자본의 위력 앞에 늘 무릎 꿇는 ‘우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보통 사람들인 그들에게 실망하기 보다는, 전지구적 자본주의로 엮어졌지만 전통, 풍습, 가치관, 사회 인프라 구조 등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는 두 국가 사이를 오가는 삶에 주어지는 연결과 단절의 성격과 그 배경에 대해 좀 더 심도있게 재고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07 공동체

마석의 이주노동자들의 사회를 하나의 공동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자본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노동력의 재위치로 이루어진 잠정적인 공동체이다. 네팔의 방문을 통해 일종의 좌절감을 맛본 믹스라이스가 이 곳에서 다시 장기간 시간을 보내고 작업을 재개시한 것은, 예술이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다는, 매개체로서의 작가의 역할이라는 꿈에 대해 어느 정도 유보상태에 들어선 이후이다. 믹스라이스는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뼈를 묻을’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의 삶은 한국에 12년씩 머물러 있었어도 언젠가는 귀국할 것이라는 것이 전제된 것임을 인식하고 있다. 네팔의 남자들은 70퍼센트 정도가 언젠가 한번은 외유하듯이 그들에게 이주의 삶이란 일반적인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이주노동자 자신들도 한국적 삶에 동화되는 것을 꺼리며, 그들을 수용하는 한국사회 역시 마찬가지다. 개인적인 면에서는 노동자 한사람이 한국에 오기 위해 지불된 브로커 수수료와 연관되어 그들 가족들과 연계된 책임, 거짓말, 오해, 현실 등의 복잡한 층위가 있다. 그래서 믹스라이스가 문화활동을 전개할 때 때로는 표면적으로 드러낼 노동자 연대와 같은 입장의 통일을 중시하는 이들과, 밀린 봉급을 받아야 ‘사람구실’을 할 수 있다는 현실주의자 사이의 갈등이 상충되고는 한다. 결국 공동체의 성립은 환상과 같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믹스라이스가 타자의 커뮤니티와 소통하기 이전에, 그리고 그들을 재현하는 권위를 스스로 부여 혹은 점유했다고 비판하기 이전에, 소위 정치적으로 일관된 공동체politically coherent community인 그들의 정체성은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통해 이미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한국 주류사회의 정체성에 부합하지 않는 이주노동자들의 정체의 요소들, 즉 피부색, 인종적 타자성, 사회적 계급, 물질적 빈곤, 불법체류와 노동관리법에 의존한 그들의 취약점 등을 악용하여 그들을 체계적으로 타자화해왔기 때문에 형성된 정치적 일관성이다. 그들의 정치적 일관성의 특징이란, 그들 스스로가 주체로서의 모습과 목소리를 드러내고 결정권을 행사하기에는 그들이 취약하다는 점과, 그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작가들은 주류사회 뿐만 아니라 작가들 자신이 가졌던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막연한 관념 혹은 기대 등을 재고하게 된다는 비일관성을 내포한다. 그들과의 협업을 통해서 상호적 대화와 배움의 과정을 낳으며, 작가가 예기치 못했던 관측을 얻을 수 있다.

나아가서, 믹스라이스가 네팔을 방문함으로써 목격하고 깨달은 그들의 모순성, 혹은 공동체라는 꿈을 와해시키는 요소는 바로 이러한 정치적 일관성이 시간과 공간의 실존성에 얽혀 있다는 점이다. 이주노동자들은 흔히 한국에서 보낸 시간성과 귀국 후 고향의 시간성이 너무나 다르다고 고백한다. 귀국해보니 그들의 친족과 친구들은 변치 않았는데 그들 스스로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 너무나 변해버려서 고국에서 재적응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귀국 후 관광객들로부터 기부금을 받기 위해 절대로 완성되지 않을 거대한 절을 짓고 있는데, 이러한 사기행각은 한국인에게서 배운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그들 ‘타자’의 집단적 정체성은 그들의 한국의 외유를 통한 조건부의 요소들로 구성된다. 마석에 거주하는 그들의 삶의 궤적도, 그리고 개발 이후 그들의 향방도 역시 불확실하며 우발적인 요소가 농후한 것이다.

커뮤니티 연극으로 돌아가보자. 커뮤니티라는 개념은 가족 바깥의 사회적 공간중에서 가장 친밀한 정신적 문화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곳을 의미한다. 공동체의 연대를 부르짖는 이들은 때로는 전근대의 농촌 혹은 심지어 더 원시적인 시대의 사회적 형태를 환기시킨다. 그러나 이러한 본질적이며 내부적 갈등으로부터 자유로운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것이 유토피아적 환상이라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리라. 그러한 면에서 케스터가 논하는 정치적으로 일관된 커뮤니티라는 개념이 조건부적인 혹은 우발적인 요소를 전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석의 커뮤니티만 보아도 그 속에는 이슬람 교도들을 포함한 여러 종교의 신봉자들이 있다. 성과 결혼에 대한 인식에서도 그들은 일치하지 않는다. 비교적 전통적인 그들의 고국과 서구화된 한국 사이에서 자의든 타의든 이중적 성과 결혼의 현실을 살고 있는 이들도 있다. 각 다른 국가에서 온 것은 물론, 그들의 성장 배경과 경제적 배경 및 목표 등도 다를 수 밖에 없다. 그러기에 이러한 다원적이며 비본질주의적인 현실을 감안하는 커뮤니티 연극 그리고 믹스라이스의 미래 활동이 기대된다. 사실 <불법의 인생>이라는 제목은 강하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서구 제국주의를 본받아 이제 제국의 일면으로 드러나는 한국내의 자본주의, 그리고 인종차별주의와 편견 등으로 트라우마를 입은 인물들로 묘사되는 점은 문제가 있다. 관객이 등장인물들을, 즉 이주노동자라는 특정한 타자의 인종 뒤에 도사리고 있으리라 무의식적으로 기대하여 그들을 빈곤하고 암울한 그림자 속으로 다시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비록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하고 거주하지만, 사실 대개가 그러한 편견적인 트라우마와는 거리가 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건강한 일반인들이다.


08 세속

세속적이라는 단어는 한국과 같이 수많은 토속 민간 신앙과 외래 종교들, 그리고 그 혼성적 양태들이 난립해온 지난 세기의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일반적으로 물질만능주의나 명예와 쾌락 지향적인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일 때가 많다. 이는 상당히 곤란한 상황이다. 세속적이란 사전적 정의로 보면 ‘이 세계 속의’라는 뜻이며, 종교적 혹은 정신적 문제들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평론가 기타 카푸어는 에드워드 사이드를 언급하며 말하기를: “세속적이라는 것은 의식적인 노력을 통해 종교적 연대, 민족주의 운동, 특권층과 연계된 엘리티즘이 추구하는 바에 저항하는 비평적 실천이다. 그것은 하나의 보편적 조건의 근사치를 제시하는 시민권의 추상적 형태에 참여하는 것이며, 변증법적으로 이해되는 소속과 비소속을 동시에 지칭한다.”

이것은 더 큰 맥락에서는 네그리와 하트가 주창한 바, 제국의 구도 위에서 이산하는 노동자들에게 전지구적 시민권과 임의로 국경을 건너 움직일 권리를 허용하라는 주문과도 연결된다. 전지구적으로 이동하는 자본에 따라 함께 이동하는 노동력에 대한 최소한의 기본적 인권존중의 차원에서 그들의 요구는 절실하다. 지리적 경계를 초월하여 다중적 네트워크를 구성해야 하는 필요성이 더욱 부각되지만, 그들의 요구가 효과적으로 행정적 지원을 받아 현실화되기에는 요원하다. 하지만 믹스라이스의 활동은 ‘시민으로서의 작가로서 정치적 프로젝트를 전위적 미학으로 번안하는 과정에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가’라는, 한국사회에서도 익숙하지만 중요한 난점을 다시금 묻고 있다.


09 동사형

믹스라이스는 믹스드라이스 mixed rice, 즉 섞인 쌀, 혹은 잡곡이라는 명사형의 단어를 (고의로) 틀린 문법으로 표기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믹스라이스mixrice는 쌀을 뒤섞으라는 명령형의 동사로 읽힌다. 영어의 발음상 믹스라이스는 믹스래이스mixrace, 즉, 인종을 뒤섞으라는 동사형의 신조어의 의미에 접근한다.


10 시간성

믹스라이스의 행동적 작업을 글로 쓰는 데의 어려움은 그들의 작업이 전통적 의미의 미술품을 남기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회화나 조각을 들여다보고 노트를 적는 행위로서 준비될 수 있는 성격의 작업이 아니다. 이것은 또한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시간성이라는 거대한 요소에 종속되어 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믹스라이스는 2001년부터 현재까지 지난 8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인 과정을 통한 작업에 임해왔다. 이것은 작가의 유일무이한 작업에 대한 수동적 감상이라는 이분법적인 관계를 멀찌감치 벗어나서, 현실의 삶속에 깊숙히 개입한 공적인 장소들과 그 속의 특정한 개인들 사이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공적인 시간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들의 작업은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어울려 있는 순간들 속에서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한 와중에 믹스라이스가 이주노동자들의 모습을 담겠다고 판단하여 남긴 많은 사진들을 들여다보면 어떠한 인물들과 어떠한 장소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은 읽을 수 있지만, 그 이미지 속에서 어떠한 말들과 느낌들이 오고 갔는지를, “맥락의 뉘앙스”를 파악한다는 것은 자명하게도 불가능할 뿐이다. 하지만 때로는 자연스럽게, 때로는 구성된 상황적 순간 속에서 새로운 사회적 관계를 모색하는 와중에, 그들 상호간에 “생성, 체험, 반성, 참여, 증식, 축적, 변화” 등이 이루어진다.



Hans Belting, Art History After Modernism (Chicago: Univeristy of Chicago Press, 2003), 198.
Anthody D. King, Spaces of Global Cultures (London: Routledge, 2004), p.4
Eugene van Erven, Community Theatre: Global Perspectives (London: Routledge, 2001), 248-255.
작가의 이메일, 2008년 12월.
Mike Davis, Planet of Slums (London: Verso, 2006), 31.
작가의 이메일, 2008년 12월.
McKenzie Wark, A Hacker Manifesto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4), 137.
Clare Bishop, ed., Participation (London: Whitechapel, 2006), 12.
Nicholas Bourriaud, Relational Aesthetics (Paris: Les Presses du Reel, 2002), 84.
포스터의 논문 제목 <채트룸Chat Room>의 ‘채트’는 편하고 가볍게 대화를 나눈다는 뜻이다. 그는 관계적 미학 혹은 대화적 미학이 추구하는 대화는 진지한 (혹은 학구적인) 담론이 아니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비숍의 편저에 수록된 이글의 원제목은 <아티 파티Arty Party>, 혹은 “예술인척 하는 파티”였다. Bishop, 190-195.
Grant Kester, Conversation Pieces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4).
Anthony Cohen, The Symbolic Construction of Community (London: Routledge, 1985), 15.
Geeta Kapur, “Secular Art, Citizen Art” in Art and Social Change (London: Tate, 2008), 422.
Antonio Negri and Michael Hardt, Empire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1).
Kapur, 423.
매사추세츠 주립대 역사학 교수 댄 고든Dan Gordon의 재치있는 지적이다.
이 글은 믹스라이스와의 수차례에 걸친 인터뷰와 지속된 질의 응답에 의해 가능했다. 그리고 대화적 미학을 통한 많은 협업들이 기록의 부재로 인해 글쓰기에 어려움을 주는 것이 일반적인데, 믹스라이스는 풍부한 기록물을 보존하고 있기에 이 글을 쓸 수 있었다. 그들의 협조에 감사한다.
박찬경, <공공의 순간> 국제작가포룸 2006, 뉴스레터 Vol. 1, 14.

글: 문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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